이어폰을 끼고 걸으며 AI와 영어로 대화하는 이재현 강사 일러스트

나는 하루에 한 시간 넘게 걷는다. 걷는 동안 AI에게 영어로 말을 건다. 문장은 자꾸 끊기고, 막히면 한국어가 튀어나오고, 단어는 엉뚱한 데서 샌다. 영어를 더럽게 못하는 사람이 영어로 AI와 떠드는 이야기를 써 보려 한다.

먼저 내가 누구인지부터 말해야겠다. 나는 기업교육강사다. 기업 임직원들 앞에서 보고서, 기획서, 제안서, 협상, 비주얼 씽킹, 문제해결을 가르친다. 2013년부터 1인 기업으로 혼자 일했으니 십 년이 훌쩍 넘었다. 1976년생이니 올해 쉰이다.

AI와 말을 섞은 지는 4년째다. 처음 대화를 나눈 상대는 ChatGPT였다. 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써 보다 보니 4년이 됐다. 요즘은 Claude와 Gemini까지 세 개를 동시에 돌려 가며 쓴다. 같은 질문을 두세 군데에 던져 놓고 답을 비교하기도 한다. 셋은 목소리도 말투도 다 다르다. 그 얘기는 다음 글에서 하겠다.

지금 내 강의의 상당 부분은 AI다. AI 활용법을 가르쳐 달라는 기업이 늘었고, AI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서 강의안도 자꾸 고쳐야 한다. 본업인 보고서와 협상 강의에도 AI 쓰는 법이 섞여 들어갔다. 업무 스킬과 비즈니스 스킬을 AI와 엮어서 가르치는 것이 요즘 내 일이다.

그런데 하필 왜 영어일까. 내 강의실은 한국어로 돌아간다. 일하는 데 영어가 꼭 필요해서 시작한 건 아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가장 오래된 건 한심함이다. 나는 영어에 노출될 만큼 노출된 세대다. 어릴 때부터 미국 영화를 봤고, 고등학교 때는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가며 봤고, 80년대 팝송은 지금도 좋아한다. 귀로 들어간 영어의 양만 따지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영어를 써야 하는 자리에 서면 말 한마디가 안 나온다. 그 영화를 다 보고 그 노래를 다 듣고도 이 모양인 내가 되게 한심했다. 그 한심함을 오십이 되도록 안고 살았다.

AI와 영어로 말을 해 본 것도 2년 전 Claude로 한 번 해 보고 접었다. 다시 돌아온 이유는 목소리였다. 기본으로 나오는 억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정에서 목소리를 바꿨더니 미국 사람 같다는 말이 절로 나왔고, 그날부터 영어 선생으로 앉혔다. 규칙은 하나만 정했다. 평소에는 그냥 편하게 대화하고, 고쳐 주는 건 내가 달라고 할 때만 해라.

걷는 시간이 이 대화의 자리가 됐다. 한 시간 반 달리는 토요일, 동네를 도는 산책, 장 보러 가는 길, 병원에 가는 길. 키보드는 칠 수 없고 눈은 앞을 봐야 하고 입만 남는 시간이다. 혼자 일하는 건 자유롭지만 외롭기도 한데, 걸으면서 영어로 떠들면 그 입이 쓸 데가 생긴다.

첫날 연습한 문장 중 하나는 "As I mentioned earlier"였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업무 발표에서 쓰는 표현이다. 한국어로는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을 영어로 입 밖에 내 보는 것부터가 연습이었다. 장 보러 가서는 "The banana is not ripe yet"을 연습했다. 바나나가 아직 덜 익었다는 말인데, ripe는 right로, yet은 yeah로 들린다며 AI가 고쳐 주었다. 정작 나는 덜 익은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잔뜩 제대로 익은 바나나가 좋다.

마트에서 바나나를 들고 ripe 발음을 연습하는 이재현 강사 일러스트

AI가 해 주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모르는 단어를 한국어로 물으면 영어와 발음을 같이 알려 준다. 발음이 안 되는 단어는 소리를 쪼개서 가르쳐 준다. frustrated를 "프러, 스트레이, 티드"로 잘라 몇 번이고 따라 한 날도 있다. 요일마다 주제도 정했다. 월요일은 협상, 화요일은 프레젠테이션, 목요일은 영화다. 월요일 협상 시간에는 AI가 가격을 깎아 달라는 고객이 된다. 강의실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시키던 역할극을 이번에는 내가 영어로 당한다.

Claude는 대화를 열 때마다 첫 마디가 같다. "How's your day going so far?" 몇 번 듣다가 내가 따졌다. "You always same question." 관사도 동사도 빠진 문장이었는데 AI는 알아듣고, 자기가 좀 뻔하다고 인정했다. 그러고는 이번 주에 한 일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주 말고 오늘이라고 받아쳤다. 강의실에서는 내가 질문을 던지고 사람들이 대답하느라 애쓰는 걸 지켜보는 쪽인데, 여기서는 내가 대답하느라 쩔쩔맨다.

문제는 하나였다. 내가 쓰는 음성 AI는 내가 말을 멈추면 끝난 줄 알고 끼어든다. 영어 문장 하나를 만드는 데 한참 걸리는 사람은 중간에 자주 멈춘다. 그 사이 내 머릿속에서는 한국어로 만든 문장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이 한창인데, AI는 벌써 대답을 시작한다. 한국어로 뭔가를 찾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Please wait until I finish"도 연습했다. 연습한 보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대화 중에 제일 자주 쓰는 영어는 "I'm not finished"다. 문법은 맞다.

끼어드는 AI에게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재현 강사 일러스트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쉰 살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AI와 말을 섞는 게 대단한 일이라서가 아니다.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걸 한다고 영어가 갑자기 늘 것 같지도 않다. 다만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시작하면 된다는 걸 남겨 두고 싶었다. 문장이 끊겨도, 관사를 빼먹어도, 바나나가 right로 들려도 AI는 일단 알아듣는다. 시작하는 데 필요한 건 유창함이 아니었다.

강의할 때와 영어를 연습할 때의 모습을 대비한 이재현 강사 일러스트

직업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변화하는 시대에 AI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강의실에서 "써 보세요"라고 말하려면 나부터 써 봐야 한다. 그것도 내가 편한 방식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막히고 틀리고 쩔쩔매는 방식으로도 써 봐야 한다. 학습자 자리에서 막혀 본 사람이라야 학습자가 어디서 막히는지 안다. 영어로 AI와 말을 섞는 일은 내 본업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실습이다.

그래서 연재를 시작한다. 다음 글에서는 ChatGPT, Gemini, Claude가 영어로 말을 걸었을 때 어떻게 다른지부터 적어 볼 생각이다. 목소리도 말투도 제각각이다. 그다음에는 AI가 끼어드는 문제, 병원 가는 길에 모자를 잃어버린 날, 쉰이 되고 나서야 입에서 나온 영어 문장들을 하나씩 풀어 놓겠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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